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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디의 시작은 골프앤에서···

언론보도

[김대중의 골프히스토리] 챔피언 골퍼 ‘앨런 로버슨’ ②

작성자 : 이지현
2023-06-20 (283)


















▲ [그림 5] 1857년 세인트 앤드류스에서 열린 최초의 클럽간 대결 기념 촬영, 출처: 세인트 앤드류스 대학 도서관



※본 기사는 본사와 제휴한 조세금융신문과 동일하게 게재한다.



앨런의 인생 1막이 볼 제작자로 유명세를 떨쳤다면, 그의 인생 2막은 골프로 세상을 지배하게 된다. 통상 챔피언 골퍼는 디 오픈 우승자에게 주어지는 명예로운 칭호다. 1860년 디 오픈이 생기기 전에 챔피언 골퍼라고 자타가 인정했던 골퍼가 앨런이다.



앨런은 생계를 위해서 돈 내기 골프, 캐디, 골프 볼 제작, 골프 클럽 제작, 골프 강습을 했으며, 당시 대부분의 프로들도 생계를 위해서 똑같은 일을 했다. 이러한 프로들 중에서 최초의 프로 골퍼라는 칭호를 받고 있는 사람 또한 앨런이다.



앨런을 골프 신이라고 말하는데, 그를 신의 위치까지 올린 이유가 바로 그가 한번도 돈 내기 시합에서 져 본 적이 없다는 사실이다. 심지어 골프 타수를 조절하면서까지 내기 골프를 했다는 기록도 있다.



그가 28살이 되던 1843년 6월 윌리 던 시니어(Willie Dunn Sr., 1821-1878)와의 역사적인 시합 이후부터 챔피언 골퍼로 불리게 된다. 이 시합은 기록에 남아있는 최초의 골프 별들의 전쟁이었다.

1843년 머셀버러 출신이면서도 특이하게 잉글랜드의 블랙히쓰에서 1851년부터 1865년까지 활동했던 22살 윌리 던 시니어가 앨런에게 도전장을 냈다.



일명 챌린지 매치(Challenge Match)가 벌어졌는데, 그 당시 수많은 챌린지 매치가 열렸고, 이 경기들을 통해서 골프가 훨씬 더 대중화되는 계기가 된다.



대결 장소는 8홀 코스인 머셀버러에서 열렸다. 당연하게, 머셀버러에서 태어나고 골프를 배웠던 윌리 던이 너무나도 유리한 경기였다. 앨런이 윌리 던의 선택을 순순히 따라준 것은 아마도 전성기를 구가하던 골프 신의 여유로움이 아니었을까?



시합은 하루 2라운드씩 10일간 총 20라운드로 승부를 결정짓는 방식이었다. 9일이 지난 성적은 앨런이 1라운드 이기고 있었고, 마지막 날 오전 라운드도 앨런이 이겨서 ‘투 라운드 업, 원 투 플레이(2 rounds up, 1 to play, 1라운드 남긴 상태에서 2라운드를 이긴 상태)’가 되어서 오후 경기를 하지 않아도 승부가 결정되었다.



세인트 앤드류스와 머셀버러는 골프에 있어서 엄청난 라이벌 관계였고, 두 클럽 간 시합이 있으면, 엄청난 관중들이 몰렸다고 한다. 경기도 구경하면서 돈 내기도 즐기면서…. 예나 지금이나 감정이 들어간 시합에 돈을 걸면 더 경기가 재미있어지기 때문에 이 라이벌 경기에 걸린 판 돈이 어마어마하게 된다.



이 당시 상황을 이해하기 편하게 그림을 보면서 설명하려고 한다. <그림2>은 1847년 챨스 리스(Charles Lees)가 그린 작품으로 당시 골프 경기를 하고 있는 플레이어와 캐디, 그리고 갤러리까지 생생하게 볼 수 있는데, 퍼팅을 하고 볼이 홀 안에 들어가는 순간을 보려고 집중하고 있는 플레이어와 홀을 기준으로 맞은 편에서 클럽을 어깨에 매고, 왼쪽 발을 들어서 허리를 튕기는 듯한 포즈의 캐디가 보인다. 볼이 라인을 타고 움직이는 순간을 표현한 듯한 재미있는 포즈다.
챨스 리스의 또 다른 작품은 앨런을 그린 <그림3>이다. 이 그림은 <그림4>에 나오는 앨런의 모습을 그대로 따라서 그린 것이다. <그림4>에 등장하는 사람 중에 왼쪽 두 번째 모습이 앨런이며, 바로 옆 오른쪽에 클럽을 파지하고 볼을 내려다 보고 있는 사람이 앨런의 파트너 올드 톰 모리스다.



<그림3>과 <그림4>를 비교해서 보면, 앨런의 모습을 좀 더 자세히 볼 수 있다. <그림4>가 찍힌 시기는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추측컨데 1843~1847년 사이라고 유추해볼 수 있다. 이 사진은 데이브 힐과 로버트 아담슨(David Hill & Robert Adamson)이 찍은 사진으로 사진에 등장하는 인물은 좌측부터 캡틴 데이비드 캠벨(Captain David Campbell), 앨런 로버슨(Allan Robertson), 톰 모리스(Tom Morris), 밥 앤드류(Bob Andrews), 휴 플레이페어(Sir Hugh Playfair) 경, 윌리 던(Willie Dunn)과 와티 알렉산더(Watty Alexander)다.

1849년 앨런과 올드 톰 모리스가 같은 팀으로, 머셀버러의 영웅 윌리와 제이미 던 형제가 3번의 경기를 치렀다. 이 당시로는 엄청난 상금인 400파운드(현재 시세로 약 1억원)가 걸린 시합으로 엄청난 관중을 동원했다. 물론, 상금 이외에 갤러리까지 상금보다 수백배 많은 엄청난 내기 판돈이 걸렸던 경기였다.



매 경기는 20라운드씩 경기를 치렀고, 첫 경기에서는 던 형제가 그들의 고향인 머셀버러에서 쉽게 이겼다. 두 번째 경기는 세인트 앤드류스에서 열렸는데, 앨런과 모리스 팀이 가까스로 이겼다. 1대 1 무승부 상황에서 마지막 결승은 중립지역인 노쓰 버윅(North Berwick)에서 열렸는데, 8홀 남긴 상태에서 4다운으로 앨런 팀이 지고 있었다.



패색이 짙은 가운데, 앨런 팀은 엄청난 기적을 만들어 낸다. 연속으로 6홀을 이겨버린 것이다. 최종 스코어 2대 1. 세인트 앤드류스에서 온 갤러리들의 엄청난 환호를 받은 이 최강의 스승과 제자 팀은 포썸(Foursome) 경기에서 패배한 적이 없다는 기록을 가지고 있다.



1857년 최초로 스코틀랜드 클럽 간 그랜드 포썸 토너먼트 대회가 세인트 앤드류스에서 개최되었다. 각 클럽에서 두 사람이 한 팀을 이뤄 경기했는데, 이때 에딘버러, 리스, 퍼스, 노쓰 버랙, 몬트로스, 모노피쓰, 에버딘, 프레스트윅, 카누스티, 블랙히스 총 11개 팀이 출전했고, 첫 대회에서 로얄 블랙히스가 우승했다. 재미있는 사실은 로얄 블랙히스는 스코틀랜드가 아니라 잉글랜드 최초의 클럽이라는 점이다. 클럽은 잉글랜드에 있지만, 스코틀랜드 클럽 간 대결에는 스코틀랜드 출신 선수가 출전했다고 한다.


1858년 앨런이 죽기 바로 1년 전에 세인트 앤드류스 올드 코스 최초로 80타 기록을 깨트렸다. 이 기록은 고스란히 <그림6>의 기록으로 남아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이 기록을 깨기 위해서 사용했던 볼이 구티(guttie) 볼이었다.



1848년 처음 등장한 구티 볼이 골프계에 미친 파급 효과는 어마어마했고, 1차 골프 대중화를 이끈 엄청난 역할을 하였다. (1차 골프 대중화를 일으킨 3가지 주요한 요소는 다음 호에 설명하겠다.)



골프가 대중들의 사랑을 받기 위해서 가장 시급한 문제가 바로 골프 볼 가격이 너무 높다는 진입장벽을 깨야만 하는 것이다. 만드는 시간도 오래 걸리고, 내구성 또한 문제였던 400년 역사의 페더리 볼은 비싼 가격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부유한 계층의 전유물인 골프로 자리매김한다. 그러나, 페더리 볼이 하나에 5실링이었던 시기에 구티 볼, 구타 페르차(Gutta-percha)의 발견은 볼 가격을 하나에 1실링(현재 가치로 약 2,400원 정도)으로 5배 싸게 만들면서 획기적인 성과를 보여준다.


이 당시 페더리 볼 제작의 최고 권위자 앨런은 패밀리 비즈니스를 위기로 몰아 넣을 새로운 기술의 결정체인 구티 볼에 대해서 나쁜 시각을 가질 수밖에 없었고, 그의 제자인 올드 톰 모리스는 이 새로운 볼의 가능성을 아주 높게 보았다. 골프계의 위대한 두 파트너 간 갈등이 시작되었다. 결국 골프 볼 논쟁으로 인해서 이 둘 사이가 완전하게 갈라져 버렸고, 앨런은 골프 인생의 최고 동반자인 올드 톰 모리스를 해고하면서까지 반대하던 구티 볼을 가지고 골프 역사에 영원히 기록될 스코어를 달성하였다.

[출처] 골프앤포스트(http://golfnpost.com/news/article.html?no=23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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