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프앤포스트=김대중 골프앤파트너 대표) 기록으로 본다면, 골프의 기원은 스코틀랜드이지만 캐디라는 말의 어원은 프랑스다. 물론 그 중심에는 스코틀랜드가 있다.
프랑스어 ‘르 카데(Le Cadet)’는 소년 또는 한 집안의 막내라는 뜻이다. 이 단어가 프랑스에서 스코틀랜드로 넘어가면서 영어에 ‘커뎃(Cadet)’이라는 단어가 처음 기록으로 나타난 때가 1610년이며, 1634년부터 짧게 ‘캐디(Caddie 또는 Cadie)로 기록된다. 참고로, 영어 ‘Cadet’은 경찰이나 군대의 간부(사관) 후보생이다.
‘카데’라는 단어가 프랑스에서 스코틀랜드로 넘어오는 계기는 매리 스튜어트(Mary Stuart, 1542~1587)라는 최초의 여성 골퍼 때문이다.
[그림 1]은 1905년에 그려진 그림으로 세인트 앤드류스 링크스(St. Andrews Links)에서 골프를 치고 있는 매리 여왕의 모습이다. 그림에서 보듯이 이 당시에는 골프 코스에 대한 개념이 없고 골프를 즐기는 장소만이 있을 뿐이다.
[그림 1]에서 어드레스 중인 매리 여왕 옆에 ‘카데들’이 골프클럽을 들고서 서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이 당시에는 골프백이 없었기 때문에 골프클럽 여러 개를 캐디가 들고 다녀야 했다. 그 당시에는 골프클럽 개수에 제한이 없어서, 카데가 들고 있는 우드로 보이는 2개 클럽과 매리여왕이 어드레스하고 있는 아이언 클럽을 포함해 3개의 클럽으로 골프를 즐긴 것으로 보인다.
1905년도에 그려진 이 그림을 자세히 보면 골프공에 딤플1)은 없지만, 이 그림이 그려진 1905년도 골프 공과 아주 유사하게 보인다. 하지만, 이 그림을 역사적 사실과 비교해서 보면 골프 공이 잘못 그려진 것을 알 수 있다.
1) 딤플(dimple)은 골프공의 표면에 동그랗게 패인 홈을 말하며, 공에 따라 딤플의 수나 크기 늘어선 모양이 다르며 딤플의 형태에 따라 떠올리는 힘이나 방향성도 크게 달라진다. 딤플은 공기저항을 더 적게 만들어서 딤플이 없는 공보다 더 멀리 가게 하는 역할을 한다.
골프 공 역사를 간단하게 살펴보자.
초기 골프 역사에 등장한 공은 나무로 만든 공이었고, 나무 공을 대체한 것이 바로 새의 깃털로 만든 공이다. 깃털 공이 정확히 언제부터 사용되었는지에 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기록으로 보면 1743년에 페더리 볼이라고 불리는 깃털 공이 사용되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깃털 공은 엄청나게 비싸서 소수의 사람들만이 이 공을 사용하였다. 깃털 볼을 대체한 것이 고무나무 수액에서 채취한 생고무로 만든 공이었고, 이 공은 1845년부터 사용되었다. 1860년도부터 딤플이 들어간 구타 페르차 볼이 만들어졌기 때문에 매리 여왕이 세인트 앤드류스에 골프를 즐기던 당시 골프 공은 둥그란 형태를 갖춘 나무로 만든 공이었을 것이다.
캐디의 역사는 메리 여왕과 함께하기 때문에 메리 여왕에 대해서 조금은 자세하게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일명 비운의 여왕 매리에 관한 이야기다.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거기에 프랑스 왕위 계승권까지 지닌 채 너무나도 화려하게 태어난 매리는 스코틀랜드의 마지막 여왕이다.
아버지의 얼굴도 못 본 채 생후 6일만에 아버지 제임스 5세(James Ⅴ, 1512~1542)가 외숙부인 잉글랜드 왕 핸리 8세(Henry VIII,1491~1547)와의 전쟁 중에 사망하게 되어 생후 9개월의 나이로 스코틀랜드의 왕위를 계승한 여왕이 된다.
[그림 2] 매리 여왕의 가계도를 간단하게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그림 왼쪽 붉은 색은 잉글랜드 왕족 가계도이며, 오른쪽 파란색은 스코틀랜드 왕족 가계도다. 잉글랜드 왕의 이름은 헨리라는 이름을 사용하고, 스코틀랜드 왕들은 제임스라는 이름을 여자는 매리라는 이름을 즐겨 사용했었다.
매리 여왕의 아버지는 제임스 4세이고, 제임스 4세의 어머니와 매리 여왕의 아버지를 죽인 헨리 8세와는 남매지간이다. 즉, 외삼촌이 조카를 죽인 막장 드라마다.
이 당시 유럽은 왕족들 간의 혼맥이 매우 복잡하였으며, 메리 여왕의 경우도 할머니는 잉글랜드 왕족, 할아버지는 스코틀랜드 왕, 어머니는 프랑스, 이탈리아, 룩셈부르크, 스페인 왕조에 기반을 두고 있는 훗날 부르봉2) 왕가 출신으로 자신의 혈통에 대한 자부심이 뛰어났을 것이다.
2) 부르봉(Bourbon)의 어원은 켈트어로 진흙(Borvo 혹은 Borbo)를 뜻하며, 부르봉 왕가는 1272년 루이 9세의 막내 아들인 로베르 드 프랑스(Robert de France)로부터 시작된다. 부르봉 왕조는 프랑스에서 1589년부터 1791년까지 그리고 1814년부터 1830년까지 지속되었으며, 에스파냐에서는 1701년부터 통치하였고, 이외에도 나바르, 프랑스, 스페인, 양시칠리아, 룩셈부르크, 안도라, 루카, 파르마와 같이 유럽의 여러 나라를 다스렸고, 여러 분파로 나뉘었다. 출처:위키피디아
첫 번째 결혼과 갑작스런 죽음
매리 여왕은 6살에 프랑스 왕자와 약혼하여 프랑스에서 망명생활을 시작했지만, 화려한 삶을 살았다. 메리는 선대 왕들처럼 거의 매일 골프를 즐겼다고 하며, [그림 3]과 [그림 5] 영화 포스처처럼 키 180센치미터 장신에 얼굴은 작고 목은 가늘고 길었으며, 머리카락은 적갈색이었다고 한다.
매리 여왕으로 인해 유럽에서 미의 기준이 바뀌었다고 이야기할 정도로 메리 여왕은 유럽 사교계의 아이콘이 되었다. 프랑스에서 매리는 왕족으로서 라틴어, 그리스어, 스페인어, 이태리어, 영어, 프랑스어까지, 그 당시 모든 언어에 능통했으며, 그녀는 지성과 미모 거기에 프랑스, 스코틀랜드, 영국의 왕위 계승권을 모두 가진 적통의 왕족이었다. 그러나 힘없는 여왕으로서는 이 모든 것들은 불행의 씨앗이 되었고, 그녀는 죽을 때까지도 왕위 계승권으로 인한 고통스러운 삶을 살아야 했다.
그 당시 프랑스에서는 스코틀랜드 스타일의 골프가 생소했으며, 골프장이 없는 프랑스에서 골프를 즐기기 위해 풀이 잔뜩 있는 넓은 벌판에서 골프를 즐기고 있는 메리는 프랑스인들에게는 너무나도 생소하고 신기한 존재였을 것이다.
젊은 매리 여왕을 경호하기 위해 젊은 카데들은 무기 대신 골프클럽을 들고 경호를 했을 것이다. 프랑스에서는 군대의 간 부후보생(cadet)이 왕족 골퍼들을 위해서 골프클럽을 들고 다녔다고 하는데, 역사적 사실로 봤을 때는 매리 이전에 프랑스 골퍼가 없었기 때문에 메리의 경호를 담당했던 카데들이 매리 이후에도 골프를 치는 왕족들을 경호하면서 골프클럽을 들어주는 역할을 했을 것이다.
매리 여왕이 스코틀랜드로 돌아갔을 때 메리 여왕을 경호하던 프랑스 군 간 부후보생(cadet)들도 같이 건너오게 되었고 그 카데들이 여전히 스코틀랜드에서 칼 대신 골프클럽을 들었던 것이 그 당시 캐디라는 신조어가 만들어진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프랑스 왕비가 된 지 1년만인 1561년에 남편인 프랑스아 2세(Francois II, 1544-1560)의 죽음으로 스코틀랜드를 떠난 지 13년만에 19살의 나이로 고국으로 다시 돌아오게 되었다.
자신이 여왕으로 있던 스코틀랜드에 대한 기억보다는 유년기를 보냈던 프랑스에 대한 추억만이 가득했을 매리여왕은 프랑스를 떠나고 싶지 않았겠지만, 남편 프랑스아의 죽음으로 인해서 어쩔 수없이 등 떠밀려 스코틀랜드로 돌아올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스코틀랜드로 돌아갈 때도 당연하게 그의 보디가드들(카데)의 호위를 받았을 것이다.
두 번째 결혼과 의문의 죽음
1565년 23살 메리는 3살 연하이자 복잡한 족친 관계인 단리 경 헨리 스튜어트(Lord Darnley, Henry Stuart, Duke of A lbany, 1545-1567)와 두번째로 결혼한다. 왕위를 탐내는 단리 경으로 인해 결혼생활은 순탄치 않았고 이 결혼은 후에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공동 군주가 되는 제임스 6세이며 1세(1566-1625)라는 결실 만을 남기게 된다.
기록에 의하면 단리 경은 거만하고, 연약하고, 미성숙했으며, 알코올 중독자에, 메리 앞에서 그의 비서를 잔인하게 칼로 찔러 죽이기까지한 잔인무도한 면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1567년 2월 단리 경은 매리 여왕이 동행하지 않은 상태에서 폭발사고가 일어났고, 폭발 현장이 아닌 근처에서 훼손되지 않은 시체로 발견되었다. 요즘 말로 의문사한 것이다. 비명횡사한 단리 경이 죽은 후 3일도 지나지 않은 상황에서 매리는 당당하게 골프를 즐겼다고 한다. 이 하나의 이벤트를 계기로 그녀는 첫번째 민심을 잃게 된다.
그러나, 매리 여왕이 그녀의 두번째 남편인 단리 경이 죽은 후 3일만에 바로 골프를 쳤다는 기록에는 역사적 논쟁거리를 가지고 있는데, 이는 그녀의 정적들이 가짜 뉴스(Fake News)를 퍼트려서 그녀의 왕위를 빼앗고 죽이기 위해서 골프를 이용했다는 이야기도 있다.3)
3) 출처: “A History of Golf” by Roger McStravick, St. Andrews Golf Press, 2017.
세 번째 강요에 의한 결혼
단리를 죽이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보스웰 백작 제임스 헵번(Earl of Bothwell, James Hepburn, 1534-1578)이 1567년 4월 매리 여왕을 납치해 강간한 후 결혼을 강요하였고, 이에 매리는 어쩔 수 없이 결혼할 수밖에 없었다. 단리 경이 의문사한 지 불과 3개월도 지나지 않은 1567년 5월 15일에 결혼식을 올렸다.
이 당시 보스웰 백작은 이미 부인이 있었기 때문에 여왕이 부인있는 백작과 결혼한다는 것은 쉽게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비록 강요에 의한 결혼이었으나, 백성들 사이에 그녀가 보스웰과 짜고 남편인 단리를 죽였다는 유언비어가 퍼져서 두번째 민심을 잃게 되었다.
예나 지금이나 민심을 잃은 정권은 힘을 잃게 되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보스웰 백작은 스코틀랜드 귀족들에게 강제로 쫓겨나 덴마크 드락스홀름에 있는 성에 갇혀있다 정신 이상으로 죽는 비참한 말로를 맞이했다.
너무 잔혹하고 비참한 죽음
1568년 26살 매리는 스코틀랜드를 떠나 잉글랜드로 망명하였고, 잉글랜드에 도착하자 마자 칼라일 성에 감금되었으며, 18년간 유폐생활을 거쳐 1587년 2월 8일 그녀의 나이 45세에 라이벌이자 고모인 잉글랜드 여왕 엘리자베스 1세(1533-1603)에 의해 반역죄로 참수당한다.
아이러니하게도 매리 여왕이 참수당하고, 1603년 잉글랜드 여왕 엘리자베스 1세가 죽은 후에 매리의 아들인 제임스 1세(James Charles Stuart, 1566-1625)가 즉위하면서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공동 군주가 되었다.
아래 [그림 5]는 2018년 영화화된 ‘스코틀랜드의 매리 여왕(Mary Queen of Scots)’으로 스코틀랜드의 매리 여왕과 그녀의 숙명의 라이벌 잉글랜드의 엘리자베스 여왕에 관한 이야기다. 위에 설명한대로 포스터에 나온 매리 여왕은 너무 젊고 매력적인 모습이라고 할 수 있겠다. 포스터에 써 있는 ‘누구에게도 고개 숙이지 않는다(Bow to No One)’라는 말이 인상적이다.
영국의 골프 역사는 1400년대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1503년 내기 골프를 즐겼던 스코틀랜드의 제임스4세(1473-1513)가 런던의 블랙히스(Blackheath)에서 골프를 쳤다는 기록이 있으 며, 스코틀랜드의 매리 여왕이 1567년 골프를 쳤다는 기록으로 인해서 그녀는 ‘최초의 여성 골퍼’ 또는 ‘골프의 어머니’라는 호칭으로 불리기도 한다.
출처: 골프앤포스트(http://golfnpost.com/news/article.html?no=23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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